대한민국 헌법 제20조는 두 문장으로 종교의 자유를 선언한다.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그리고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 짧지만 의미는 깊다. 국가는 어떤 종교도 우대하거나 배제해서는 안 되며, 국민은 자신의 신앙을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를 가진다는 약속이다. 대한민국은 바로 이 원칙 위에 세워진 나라다.
현실에서 국민이 접하는 종교의 모습은 다르다. 대통령이 불교·가톨릭·개신교 등 신도 수와 사회적 영향력이 큰 다수 종교의 주요 기념행사에 참석하는 일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국가 주요 행사 역시 이들 종교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는 역사와 사회적 영향력을 반영한 결과일 수 있지만, 국가의 종교적 중립성이라는 관점에서는 한 번쯤 성찰해 볼 지점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러한 관행이 반복될 때 자칫 국가가 특정 종교를 더 대표성 있는 종교로 인정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종교학계 일각에서는 이러한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국가와 사회가 일부 종교를 중심으로 공적 질서를 형성하는 현상을 ‘공인교(公認敎) 구조’라는 개념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이는 법률상 공인된 종교가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의 제도와 관행 속에서 일부 종교가 사실상 공적 대표성을 갖게 되는 현상을 설명하는 학술적 틀이다. 다시 말해 헌법은 모든 종교를 동등하게 대하지만, 사회적 관행은 일부 종교에 공적 대표성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이 개념이 주목되는 이유는 대한민국이 헌법상 종교 평등을 선언했음에도 현실에서는 보이지 않는 종교 서열이 작동하고 있다는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역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종교정책은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총독부는 종교를 자유롭게 방임하지 않았다. 국가가 인정하고 관리하기 쉬운 종교는 제도권 안으로 편입했고, 민족주의와 연결된 종교나 독립운동과 관련된 종교는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대종교와 같은 민족종교가 혹독한 탄압을 받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종교는 신앙의 대상이기 이전에 통치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식민지 통치 방식은 국가가 종교를 분류하고 관리하는 사고를 남겼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헌법을 통해 정교분리를 선언했지만, 사회적 관행까지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았다. 일부 연구자들이 ‘공인교’라는 개념을 제시하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 연속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물론 현재의 공적 종교 질서를 곧바로 일제의 잔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아직 이를 입증할 충분한 역사적 자료가 축적돼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헌법의 정신이다. 정교분리는 국가가 어느 종교에도 기울지 않기 위한 원칙이다. 따라서 국가는 특정 종교를 적대해서도 안 되지만, 반대로 특정 종교를 상징적으로 우대해서도 안 된다. 법적 차별이 없다고 해서 평등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반복되는 의전과 관행은 국민에게 ‘국가가 사실상 인정하는 종교가 따로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널리 인정받는 종교를 존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국민 다수가 낯설게 생각하는 종교까지 헌법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종교의 자유는 살아 있는 권리가 된다. 물론 소수종교라고 해서 모두 선하거나 비판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종교의 자유는 위법행위까지 보호하는 특권이 아니기 때문이다. 범죄는 엄정히 처벌되어야 한다. 다만 그 판단의 기준은 종교의 크기나 사회적 호감도가 아니라, 오직 법 위반 여부여야 한다.
진정한 정교분리는 국가가 종교를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다수의 종교든 소수의 종교든, 오래된 종교든 새로운 종교든 국가는 동일한 거리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종교를 평가하는 기준은 사회적 인기나 정치적 영향력이 아니라 오직 헌법과 법치여야 한다. 대한민국이 진정한 종교자유 국가라면 그 척도는 다수 종교의 번영보다 소수종교가 얼마나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는지에 있다. 대한민국은 국교를 두지 않는 나라다. 이제는 ‘공인교 구조’, 이른바 ‘보이지 않는 국교’마저 만들지 않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헌법이 말하는 종교의 자유이며,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모습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