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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타워] ‘사법 신뢰’라는 이름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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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환호 좇기보다 법에 따라 심판할 외로운 용기 필요

사법개혁 논쟁에서 ‘사법 신뢰’만큼 자주 호출되는 명분도 드물다. 더불어민주당이 올 초 사법 3법을 강행 처리하면서 내세운 것 역시 사법 신뢰 회복이었다.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잃었으므로 입법을 통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법조계 일각에서도 사법 신뢰 회복론이 제기됐다. 김선수 전 대법관은 3월 기고문에서 “법원이 앞으로의 사법개혁 작업에 참여하려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가시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우리법연구회 출신의 한 부장판사는 “국민의 신뢰 없이 존립할 수 없는 사법부는 국민의 신뢰를 잃고 개혁의 대상이 됐다”며 조희대 대법원장을 겨냥했다.

장혜진 사회부 차장
장혜진 사회부 차장

그렇다면 사법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사법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최근 몇 개월간 여러 법조인을 만날 때마다 같은 질문을 던졌지만, 누구도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오히려 한 부장판사는 이렇게 되물었다. “회복이요? 우리 헌정사에서 사법 신뢰가 높았던 적이 언제 한 번이라도 있었습니까?” 회복을 말하려면 먼저 잃어버린 신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전제부터 선뜻 성립되지 않는다.

 

사법 신뢰는 정치권이 입버릇처럼 외치는 국민 통합과 닮았다. 모두가 국민 통합을 말하지만, 정치적 성향과 이해관계가 다른 오천만 국민이 정말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 중견 법관은 “나라가 둘로 갈라진 상황에서 사법 신뢰는 요원하다”고 말했다. 하나의 판결을 두고 박수와 비난이 동시에 쏟아지는 상황에서 모두의 신뢰를 얻으라는 요구는 애초에 성립하기 어려운 주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한쪽의 신뢰를 얻는 순간 다른 한쪽에게는 개혁 대상이 되는 세상”이라고 토로했다.

 

물론 개별 판사들이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쏟아지는 사건과 기록 속에서 과로를 감수하며 일한다. 다만 개인의 성실함이 곧바로 사법 신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최근 만난 한 변호사는 “대부분의 국민은 송사를 겪을 일도, 형사사건을 경험할 일도 많지 않다. 사법제도를 깊이 탐구할 이유 자체가 크지 않다. 신뢰가 있어도 이상하고, 없어도 이상한 것”이라며 “만약 사법에 대해 강한 이미지를 갖게 된다면 대개는 언론이나 정치적 프레임을 통해 형성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그렇게 형성된 이미지가 다시 ‘국민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되돌아온다는 데 있다. 짚어봐야 할 것은 ‘국민’이라는 말 자체가 품은 추상성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은 국가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근원이지만, 현실에서 하나의 의지를 가진 단일한 행위자는 아니다. 주한외신기자협회장을 지낸 마이클 브린은 2016년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 기고문에서, 한국 사회에서는 촛불 ‘민심’을 따르는 것이 곧 민주주의와 동일시된다고 지적했다. 미국 헌법 전문의 ‘우리 국민’은 국가 권력의 정당성을 선언한 표현일 뿐, 그때그때의 여론이 국가를 직접 통치한다는 뜻은 아니다. 반면 한국에서는 추상적인 ‘국민의 뜻’이 실제 정치적 주체처럼 소환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결국 사법 신뢰라는 레토릭은 사법을 여론의 심판대 위에 올려놓는 함정이 될 수 있다. 때로는 국민 다수가 분노하는 판결일지라도,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외로운 용기가 사법의 진짜 책무다. 국민의 박수를 좇는 순간 사법은 법전 대신 여론의 눈치를 살피는 정치적 기관으로 변질된다. 사법을 평가하는 기준은 국민의 환호가 아니라 법률과 절차에 대한 충실함이다. 그것이 사법 정당성의 근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