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뿌리가 썩은 식물 잔해를 감지하면 스스로 방향을 바꿔 위험 지역을 피해 간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연구진은 이를 새로운 형태의 식물 방향성인 '부생굴성(Saprotropism)'이라고 명명했으며, 병원균에 강한 작물 개발에도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오스트리아 과학기술연구원(ISTA) 이르지 프리믈 교수와 중국 서북농림과기대 장위저우 교수팀은 국제학술지 사이언스(Science)를 통해 식물 뿌리가 부패한 식물 주변의 산성 환경을 감지해 반대 방향으로 굽어 자라는 새로운 굴성을 발견했다고 10일 밝혔다.
식물은 움직일 수 없지만 빛이나 물을 감지해 성장 방향을 정하는 ‘굴성(tropism)’이 있다. 굴광성·굴수성 같은 특성 외에도 식물 뿌리는 썩어가는 식물 잔해를 회피하는 성질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애기장대뿐 아니라 토마토, 밀, 유채 등을 이용한 실험에서 식물 뿌리가 썩은 식물 조직에 가까워질수록 반대 방향으로 휘어지는 현상을 확인하고, 이를 부생굴성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는 식물 뿌리가 부패한 식물 주변을 생물학적으로 위험한 환경으로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반면 닭고기 등 동물 유래 부패 물질에는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곰팡이가 식물 잔해를 분해하면서 유기산과 페놀산 등을 방출하고 주변 토양에 산도(pH) 기울기를 형성한다. 식물 뿌리는 이 pH 변화를 감지해 산성이 강한 지역을 피해 방향을 바꾸는 것으로 나타났다.
교신저자인 장 교수는 "동물들은 썩은 음식에 유해한 미생물이 사는 경우가 많아 본능적으로 이를 피한다"며 "움직일 수 없는 식물들이 지하에서 이와 유사한 전략을 진화시켰는지 궁금했다"고 연구 배경을 설명했다.
먼저 실험식물인 애기장대를 이용해 뿌리를 썩어가는 식물 조직과 접촉시키는 실험에서는 뿌리 길이 성장이 크게 억제됐고, 병원체 감염에 대응하는 면역·방어 관련 유전자와 신호전달 경로가 활성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식물 뿌리가 부패한 식물 조직을 단순한 영양분 공급원이 아니라 병원성 미생물이 많은 위험 구역으로 인식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현상은 사과·낙엽·톱밥 등 다양한 식물성 잔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닭고기 조각처럼 동물에서 유래한 부패 물질에 대해서는 식물 뿌리가 특정 방향으로 굽어 자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연구팀은 이 현상이 여러 작물에서도 공통적으로 확인돼 부생굴성이 식물계 전반에 존재하는 보편적 현상일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프리믈 교수는 “이는 부생굴성이 부패 자체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이 아니라 식물이 분해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화학적 신호를 선택적으로 감지해 나타나는 반응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또 이런 반응을 유도하는 핵심 신호가 죽은 식물을 분해하는 곰팡이가 방출하는 유기산과 페놀산 등 산성 물질에서 나온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곰팡이가 방출한 산성 물질이 토양에 퍼지며 pH 기울기를 형성하고, 식물 뿌리는 이를 감지해 산성이 강한 방향을 회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식물 잔해가 거의 완전히 분해돼 pH 기울기가 사라지면 뿌리도 더 이상 식물 잔해 반대쪽으로 방향을 바꾸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뿌리 표면 세포가 pH 기울기를 감지하면 식물호르몬인 아브시스산(ABA) 분포가 비대칭이 되면서 식물 잔해 쪽과 반대쪽의 생장 속도가 달라져 뿌리가 썩은 식물을 피해 굽어 자란다고 설명했다.
장 교수는 “식물 잔해는 단순한 영양분 공급원이 아니라 뿌리가 감지할 수 있는 화학적 신호를 만드는 환경”이라며 “분해되지 않은 식물 잔해를 토양에 과도하게 섞으면 뿌리가 유해 미생물에 노출될 위험이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부생굴성의 분자적 기전을 이해하면 병원체가 많은 환경을 감지하고 회피하는 능력이 향상된 작물을 개발할 새로운 기회가 열릴 것”이라며 “앞으로 부패 회피 능력이 더 강한 품종 개발도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구팀은 이번 발견이 식물과 토양 미생물 간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것은 물론, 병원균에 강한 차세대 작물 개발과 친환경 농업 기술 발전에도 새로운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했다.
특히 병원성 미생물을 스스로 회피하는 작물 개발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