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동(사진)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가 발행하는 ‘한반도 포커스’ 5·6월호 기고글 ‘김정은 체제 공식 출범 1년, 김정은 리더십과 지배연합의 안정성’에서 이같이 진단했다.
북한은 외교안보 현안이 발생하면 군부·외교부(내각)·국제부(당)가 최고지도자에게 ‘제의서’를 보고하는데, 과거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세 건의 제의서를 종합한 뒤 출구전략을 포함한 최선의 대책을 강구하는 정책조정 능력을 보였다는 것이다. 북한이 1차 북핵 위기 당시인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 등 벼랑끝 전술을 펴면서도 막후에서는 북·미 외교채널을 가동해 출구전략을 모색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1차 북핵 위기는 북·미가 ‘제네바 합의’를 도출해내면서 봉합됐다.
김정일 시대에도 북한은 2002년 우라늄농축 프로그램 문제로 2차 북핵 위기가 터지자 제네바 합의로 동결한 영변 5MW 원자로 재가동 등으로 미국을 압박하는 한편 물밑에선 북·미 대화를 끊임없이 타진하는 강온 병행 전략을 폈다. 2차 북핵위기도 북한이 6자회담 개최에 동의하면서 일단 종료됐다.
이 연구위원은 “김 주석과 김 위원장이 강경 드라이브 카드와 출구전략 카드를 모두 갖고 있었던 것은 정책조정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출구전략을 고려하지 않는 군부의 안을 채택하면 강경 드라이브 일변도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북한 권력층 내부에 출구전략이 없는 비합리적 정책 결정 구조가 형성된 데는 최룡해 군 총정치국장의 역할이 상당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 연구위원은 기고문에서 “최룡해는 당과 군의 이해관계가 상충할 경우 자신의 정치적 뿌리인 당보다 현실적 정치기반인 군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줄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지적했다. 최룡해는 김 주석의 항일 무장투쟁 대원 최현의 아들이다. 김 주석 측근 그룹 가운데 가장 먼저 김정일 후계자 추대를 주장했던 최현처럼 최룡해도 김정은 후계구도 구축 과정에 적극 가담해 김 제1 위원장의 심복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최룡해는 1990년대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간부 200여명이 남한의 정보기관에 매수된 혐의로 숙청당한 ‘황색사건’ 당시 청년동맹 제1비서 자리에 있었음에도 살아남아 ‘처세술의 달인’이라는 세평을 얻었다.
김 제1위원장 체제가 강경 일변도의 태도를 고수하는 것은 김 제1위원장의 정책 조정 리더십 결여와 최룡해의 처세술이 결합한 결과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의 출구 전략 명분이 부족하다는 시각도 있다. 장용석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한·미 양국이 원칙을 강경하게 고수하는 자세가 변하지 않은 상황에서 북한이 출구를 모색하기에는 명분이 부족하다”며 “도발 위협 국면을 지속하는데 내부 불만 등 정치적 부담이 따를 수 있지만 아직까지는 내부 논의 과정에서 국면 전환을 논의하기 어려운 상황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민서 기자 spice7@segy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