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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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훈 선거법 유죄…원심 파기 논거는?

서울고법 항소심은 지난해 1심 재판부가 국가정보원 대선·정치 개입 사건에서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공직선거법 위반 무죄를 선고했던 논거를 사실상 전부 뒤집었다.

법원은 검찰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문제 삼았던 기간을 세부적으로 구분하고 ‘대선 국면’을 지정하는 방식으로 심리전단 직원들의 트위터 글을 질적인 면뿐 아니라 양적인 면도 분석했다. 법원은 특히 원 전 원장 등이 18대 대선 기간 전 가졌던 범죄 의사를 당시 정치적 상황과 맥락 등을 바탕으로 재구성해 혐의를 인정했다. 미소를 띠며 여유 있는 모습으로 재판정에 출석한 원 전 원장은 2시간에 걸친 재판장의 치밀한 논증 끝에 철창살이 신세가 됐다. 이번 판결로 청와대는 큰 부담을 안게 됐고, 최근 무죄를 확정받은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은 도덕적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법원 “대선 국면 선거 트윗글 급증”


서울고법은 9일 트위터 글의 내용·개수 등 객관적 사실관계와 원 전 원장의 위치, 지휘·보고 체계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원 전 원장이 구 공직선거법 85조를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선거법에는 ‘공무원은 그 지위를 이용하여 선거운동을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재판부는 1심에서 단순히 대선 직전 줄어든 트위터 개수, 선거 중립 지시 등을 근거로 혐의 없다고 판단했던 부분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유죄 근거를 자세히 분석했다. 재판부는 일반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대선 국면’을 정의하고, 2012년 1월부터 12월 대선 전까지 기간을 세분해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의 트위터 개수와 내용을 파악했다.

재판부는 우선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후보로 선출된 2012년 8월20일 이후부터 대선 선거전까지 기간을 선거 국면으로 판단했다. 경쟁 구도가 가시화되고 다른 정당에 대한 부정적 평가 등이 이어질 공간이 마련됐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를 기점으로 재판부는 정치·선거 관련 글로 볼 수 있는 트위터 글 27만4800여건을 정치 글(11만9861건), 선거 글(15만3331건)로 나눠 증감 추이를 분석했다.

元 보수단체 신변보호 받으며 법정 출두 공직선거법과 국가정보원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9일 보수단체 회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항소심 선고공판을 받기 위해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던 원 전 원장은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남정탁 기자
재판부는 “2012년 7월 이후 정치 글보다 선거 글이 많아지는 역전현상이 발생했고, 8월20일 이후 정치일정과 연동된 트윗활동이 확인됐다”며 “종래 있던 사이버활동이 후보자 확정 시점과 함께 증대했고 이는 편파적 개입이라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한 원 전 원장이 심리전단 직원의 사이버활동이 선거에 영향을 주는 점을 인식하는 등 선거법 위반의 능동성 및 계획성이 뚜렷하다고 봤다.

재판부는 “원 전 원장의 사이버활동 지시가 야당 반대 관점을 염두에 두고 일관되게 이뤄졌고 상명하복 체계를 갖춘 국정원 조직을 볼 때 개인적 일탈로 도저히 볼 수 없다”며 “심리전 관여 정도, 지휘 체계 등을 고려하면 피고인들이 미필적으로나마 선거 개입 목적이 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재판부는 트윗글이 대선 전 줄어든 것도 선관위 등 감시 강화로 범죄 행위가 발각될 우려에 따른 것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법원 “원 전 원장에게 궁극적 책임 있다”


1심에서 인정됐던 국정원법 위반 역시 동일하게 유죄로 판단한 항소심 재판부는 선거법 위반의 사회적 악영향 등을 기초로 원 전 원장을 강하게 질타했다.

재판부는 “원 전 원장의 행위는 헌법이 요구하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외면한 채 국민의 정치적 의사 형성 과정에 개입한 것으로 대의 민주주의 정신을 훼손했다는 근본적인 비난을 피할 수 없다”며 “국정원의 소중한 기능 중 일부를 사실상 정치적 반대를 위해 활용하고 그 활동을 독려했다는 점에서 궁극적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국정원의 선거 개입으로 생길 수 있는 사이버공간의 여론 왜곡현상도 경계했다. 재판부는 “사이버공간에서 자유로운 의견을 개진하고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과 토론했던 국민은 이제 사이버 공론장의 순수성과 자율성을 의심할지도 모르게 됐다”며 “수많은 국민은 자신들의 의견이 국가기관의 일방적 선전 수단으로 치부될 가능성을 우려하게 될지 모른다”고 말했다.

구속을 예상하지 못한 듯 전날인 8일 신변보호 요청까지 했던 원 전 원장은 검은색 양복에 푸른색 넥타이 차림으로 이날 오후 1시50분쯤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동명 변호사 등과 악수를 나눈 원 전 원장은 이종명 전 국정원 3차장과 함께 재판정 하단 맞은 편 왼편 좌석에 앉았다. 선고 내내 꼿꼿이 고개를 세운 채 판결을 듣던 원 전 원장은 재판부가 징역 3년형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 관련 의견을 묻자 떨리는 목소리로 구속이 부당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원 전 원장의 혐의가 중대하다며 법정 구속을 명령했다. 원 전 원장이 기소된 지 1년8개월 만이었다.

이희경·조성호 기자 hjhk38@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