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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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세계문학상] 파격 상금·심사로 '숨은 보석' 발굴… 문학 다양화 기여

원로 위주 천편일률 심사관행 대신
노·장·청 다양한 심사위원단 구성
2005년 1회 수상작인 ‘미실’ 비롯
‘아내가 결혼했다’ ‘스타일’ 등 주목
드라마·영화로 제작돼 인기 끌어
김별아·정유정 등 스타?
2005년 세계문학상이 첫 회를 시작할 때만 해도 한국문학에서 장편소설이 지금처럼 범람하지는 않았다. 소설이란 모름지기 서구에서 ‘Short Story’로 분류하는 단편보다는 철학과 인간과 세상을 제대로 담아내는 장편, 바로 ‘Novel’이라는 맥락에서 장편의 활성화가 긴요하다는 문단의 요청이 있었다. 인재들이 디지털시대에 영상 장르로 대거 유출된다는 우려도 한몫 거들었다. 이들을 문학판으로 다시 끌어들이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팽배했다.

이러한 문단 내외의 요청으로 세계문학상은 1억원 고료를 내걸고 시동을 걸었다.“국내에 문학상은 300개가 넘을 정도로 범람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또 하나의 동일한 문학상을 추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 때문에 세계일보는 우선 고료를 차별화했고, 두 번째는 심사방법의 혁신을 꾀할 예정이다. 문학상의 이름만 다를 뿐 내용은 차별화되지 않는 작품 심사방식을 피하고, 응모자는 물론 많은 문학인과 독자들이 충분히 수긍할 만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거액의 고료에 부응할 만한 ‘팔리는’ 작품을 뽑으려는 상업적인 의도도 전혀 없다. 모든 선택은 투명하고 공정한 심사절차에 맡길 따름이다.”

정유정, 백영옥, 박현욱, 김별아(왼쪽부터)는 기존의 문학상과는 다른 심사방식을 선택한 세계문학상을 통해 발굴되고, 대중의 주목을 받고 있는 작가들이다.
세계문학상을 시작할 때 표방했던 이런 취지는 1회 수상작에 그대로 반영됐다. 당시까지만 해도 예심은 소장층이, 본심은 중진 내지는 원로가 맡는다는 불문율이 모든 문학상 심사에 적용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실험적이거나 파격적인 내용의 작품이 예심에서 걸러진다 해도 본심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많다는 불만이 컸다.

세계문학상은 노·장·청 9명의 심사위원단(1회 심사위원: 김윤식 김원일 박범신 성석제 하응백 김형경 서영채 김미현 김연수)을 구성, 이들이 최종심까지 같이 가는 시스템을 선택했다.

아울러 마지막 심사에서도 젊은 층이 노장의 눈치를 보지 않도록 전원이 한 표씩을 행사하는 무기명비밀투표 방식을 선택했다. 이 결과 신라시대 ‘색공지신’ 미실의 일대기를 다룬 김별아의 ‘미실’이 첫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미실’은 장안의 화제가 되어 베스트셀러 행진을 구가했고 배우 고현정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드라마로 대중 앞에 선보이는 캐릭터로 확장되기까지 했다. 

영화로도 개봉돼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었던 2회 수상작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는 세계문학상 심사 방식의 개가였다. 한 여자가 두 명의 남편을 동시에 거느리는 ‘발칙한’ 내용이 노·장·청을 합산한 무기명비밀투표가 아니면 최종심에서 선택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수상작은 첫 회의 ‘미실’을 뛰어넘는 화려한 각광을 받았다.

문학상이 매번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타를 키워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작고한 박완서 선생까지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차분한 성찰의 분위기를 이끈 3회 수상작 ‘슬롯’은 말 그대로 차분하게 대중의 관심에서 벗어났다. 4회에서는 백영옥의 ‘스타일’이 패션세계를 다루면서 다시 뜨거운 관심의 대상으로 부각됐다. 김혜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SBS에서 미니시리즈로까지 방영할 정도였다. 무명에 가까웠던 소설가 백영옥을 스타로 부각시킨 출세작이기도 하다.

5회(심사위원: 황석영 박범신 김화영 구효서 김형경 은희경 서영채 하응백 김미현) 수상작 정유정의 ‘내 심장을 쏴라’는 발표 당시만 해도 이전 수상작들에 비해 그리 눈길을 끌지는 못했다. ‘아마존 여전사’ 같다는 심사위원 박범신의 평처럼 정유정은 수상을 계기로 약진하기 시작했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이 수상작은 스테디셀러로 굳어졌고 후속작 ‘7년의 밤’은 최고의 베스트셀러를 구가했다. ‘내 심장…’은 지난해 여진구 이민기가 주인공으로 나선 영화로도 개봉됐다.

네티즌 투표에서 기대되는 차세대 작가 1위로 등극할 정도로 정유정은 한국문단의 뜨거운 감자로 부각됐다. 기성작가들이 세계문학상을 통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경우와 달리 순수한 신인을 발굴해 한국문단을 풍요롭게 만든 성과였다.

지난해 독일어로 출간된 정유정 장편 ‘7년의 밤’은 독일 유력 주간지 차이트(Zeit)지 올해의 추리소설 리스트(Krimi Zeit Bestenliste) 9위로 선정됐다. 차이트는 “정유정 작가는 한 영혼이 겪는 혼란에 대해서 천재적으로, 통찰력 있게 이야기한다”고 평했으며, 일간지 노이에스 도이칠란트(Neues Deutschland)는 “광고에서 정유정 작가를 한국의 스티븐 킹이라고 홍보했을 때 믿지 않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고 전했다.

같은 작품은 베트남에서도 출간돼 현지에서 출간기념회와 함께 정유정의 각종 매체 인터뷰도 이어졌다. 올 3월에는 프랑스에서도 출간될 예정이다.

이 시기를 전후해 ‘1억원’ 고료 여타 장편 문학상들이 신설되기 시작했다. 사실 장편소설이란 신인이 처음부터 제대로 완성하기 힘든 장르이다. 단편 수련을 제대로 거쳐야 한다는 우려가 불거져나온 배경이다.

한국문학 출판 환경이 어려워짐에 따라 우수작을 신설해 수상 범위를 넓혔다가 고료를 줄이되 대상 한 편에 집중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돌아온 우여곡절도 이러한 맥락에서 살필 수 있다. 12회 세계문학상은 뚜껑을 열고 보니 ‘재야 추리소설 작가’의 작품이 뽑혔다. 평가는 오롯이 독자들의 몫이다. 세계문학상은 풍요로운 한국문학을 염원하며 다시 나아갈 따름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