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 산하 공공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 이현주(사진) 사무총장은 2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미국이 아무리 세계 최강국이고 동맹국이라고 해도 우리 외교부의 국장급도 안 되는 관리가 대선후보들을 만나며 휘젓고 다녔다”며 “이게 우리의 슬픈 현실”이라고 일갈했다. 그는 이어 “이는 반미냐 친미냐의 얘기가 아니다”며 “나라의 품격에 관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고위 외교관 출신이 미국 외교관의 방한 행보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이 총장은 외시 13회로 주중국 공사, 국제안보대사, 주오사카(大阪) 총영사를 지냈다.
이 총장은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윤 대표가 캠프 참모들을 만나는 것까지는 문제가 없지만 대선주자 본인을 만나니 문제”라며 “이명박정부 시절에 등장한 대통령 당선인이 4강(미·중·러·일)에 특사를 보내는 것도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의당 박지원 대표(오른쪽)가 23일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호텔에서 조셉 윤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왼쪽)와 만나 자리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
미국 국무부 홈페이지에 따르면 윤 대표는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수석부차관보(Principal Deputy Assistant Secretary)와 주말레이시아 대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직급은 공사참사관(Minister-Counselor)이다. 부차관보가 우리 국장에 해당하고 공사참사관을 주로 국장급이 한다는 점에서 굳이 윤 대표의 직급을 따지자면 우리 국장급에 해당한다.
이에 따라 최대 우방국인 미국이지만 국장급 인사가 주요 대선주자를 면접하는 듯한 것이 격(格)에 맞느냐는 지적이 나온다.
외교부 출신인 미국 랜드연구소의 장부승 박사도 페이스북에서 이 총장 발언에 공감을 표하면서 “우리나라는 (대통령에) 당선만 되면 바로 주한 4강 대사들을 다 만나곤 한다”고 그동안의 관행을 비판했다. 그는 이어 “미국, 중국의 국가원수는 타국 대사들을 좀처럼 만나주지 않는다”며 “이는 단지 위신의 문제가 아니라 직급이 현격히 차이 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우리나라 대통령 밑에 있는 사람들은 허수아비가 될 수 있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역대 대선에 미국, 일본 등 주요국 외교관이 우리 대선주자나 관계자를 물밑 접촉한 사례가 있었지만 이번엔 반(半)공개 행보를 보인 것이 주목을 받는 측면도 있어 보인다. 특히 이번 윤 대표의 대선주자 연쇄 접촉은 최근 방한했던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부 장관이 외교관례를 깨고 만찬과 관련한 구체적인 의전 내용을 공개하는 결례를 저지른 뒤라 더욱 예민하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문 후보 측은 이와 관련해 “외교에는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도 있다”며 후보와의 직접 만남 대신에 서훈 이화여대 교수(전 국가정보원 차장) 등 대리 만남을 했다. 박 대표는 이날 안철수 경선후보 등이 아닌 본인이 윤 대표를 만난 것에 대해 “우리 당 대선후보들이 일정상 맞출 수 없고, (윤 대표가) 나와 개인적 친분이 있어 초청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현재의 엄중한 국제관계를 감안할 때 여러 채널에서 한·미 간 소통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과거 여러 차례 대선 캠프에 참여한 한 인사는 “미국뿐 아니라 일본 등 여러 나라 대사관에서 캠프 내 다양한 인사를 통해 만나자는 연락이 수차례 오는 것은 사실”이라며 “만나고 안 만나고는 캠프 사정에 따라 다르다”고 말했다. 한 정치전문가는 “기존 외교문법대로는 사대주의로 볼 수도 있다”면서도 “도널드 트럼프 정부는 기존의 외교문법이 파괴되고 예측불가능해 제대로 알기 위한 목적에서 대선주자가 직접 만나보는 데에 의미를 둘 수도 있다”고 말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와 관련해 “우리 정부도 미국 대선을 앞두고 힐러리 클린턴, 트럼프 후보 측 관계자를 접촉하려고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라며 “당연한 만남”이라고 했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