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한 임금과 상사의 괴롭힘 등 ‘회사 측 횡포’가 가장 큰 고민”
시민단체 ‘직장갑질 119’는 콜센터 상담사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지난 1월13일부터 ‘콜센터 119 페이지’를 통해 피해사례를 접수해왔다. 29일 세계일보가 ‘콜센터 119’로 100일간 접수된 128건의 신고 사례를 분석한 결과 ‘임금’ 문제가 53건(41.4%)으로 가장 많았고 ‘괴롭힘·폭언’이 23건(18.0%)으로 뒤를 이었다. 이밖에 ‘고용불안’이 17건(13.3%), ‘실적압박’ 15건(11.7%), ‘감시통제’ 7건(5.5%), 기타 13건(10.1%)이었다.
접수된 사례들은 과도한 업무에 비해 낮은 임금부터 실적 압박, 일방적인 계약해지, 인권침해 등 사측의 부당한 처우에 대한 문제제기가 다수를 차지했다.
한 재택 상담원은 “우리 콜센터는 할당 목표가 81콜인데 최근 콜이 급격히 감소해 5시간 연속으로 화장실을 가지 않고 받아도 할당량을 채우기가 힘들다”며 “그런데도 회사는 업무시간을 초과해서라도 목표량을 반드시 채우라고 강요한다. 실패하면 월급을 삭감하겠다고 협박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5시간 이상 근무하더라도 초과시간에 대해서는 절대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작성하도록 한다”고 털어놨다. 또 실적을 채우기 위해 자체적으로 점심시간을 줄이도록 강요하거나 무임금으로 출근시간을 1시간 앞당기고 퇴근시간을 1시간 늘리는 일도 비일비재한 것으로 드러났다.
‘제대로 쉴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한 상담사는 “휴식시간도 순번제이고 자리를 잠깐이라도 비울 때마다 단체 채팅창이나 구두로 ‘화장실 간다’, ‘물 마시러 간다’고 보고해야 한다”며 “팀당 두 명이 자리에서 빠지면 감시하는 팀장으로부터 즉각 제재를 받는다”고 말했다. 또 다른 상담원도 “조금이라도 화장실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아침조회 때 쉬는 시간 주는데 왜 그렇게 화장실을 가냐’고 타박해 치욕스럽다”고 했다. 또 다른 상담사는 “질병휴가나 생리휴가, 조퇴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며 “너무 심한 복통으로 응급실에 가는데도 다음달 월차를 대체해서 쓰게 하고 인사고과 점수를 깎았다”고 했다. 한 금융사에서 일했다는 상담사는 “팀장이 이유없이 회사에서 나가라고 강요했지만 강제퇴사임에도 합의퇴사인 것처럼 적도록 했다”며 “그로 인해 실업급여와 해고수당도 못 받고 고통받고 있다”고 실토했다.
◆고객 폭언에도 회사는 “더 잘해라”…“우울증, 불면증 시달려”
감정노동자 보호법 시행 이후 직접적인 욕설은 줄어들었으나 상담사라는 직업 자체나 개인 근로자 자체를 하대하는 발언은 빈번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 상담원은 “고객이 처음엔 점잖게 문의사항을 묻다가 갑자기 ‘외운 대로 말하지 말고 묻는 대로 답하라’, ‘너는 그렇게 일하고도 회사가 월급을 주느냐’, ‘그렇게 말할 거면 집에 가서 아이 동화책이나 읽어주라’, ‘최저시급 받을 텐데 나랑 통화하면 인센티브 받는 거냐’ 등 비아냥을 계속 이어가 모멸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럼에도 팀장은 고객의 말에 변명하지 말고 끝까지 다 들어야 한다고 지시했다. 해당 상담원은 “밤새 울고 출근한 다음날 개선할 점, 잘못한 점 등 셀프 모니터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며 “자기비판 느낌이 들어 거부했더니 제 실적에 영향이 있을 수 있다고 강요했다”고 제보했다.
또 다른 한전 고객센터 직원은 “전화가 몰려 응대가 늦을 경우 ‘내 세금으로 일하면서 왜 이렇게 전화 늦게 받냐’, ‘너 용역이지? 그러니까 용역이나 하지’ 등의 발언을 흔하게 한다”며 “무엇보다 힘든 건 욕설과 불만을 들은 후 심장이 떨리고 감정이 요동치지만 바로 마음을 다잡고 웃으면서 다음 고객에게 응대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정신적 감정노동을 경험한 근로자들은 ‘마음의 병’에 쉽게 걸리는 것으로 확인됐다. 최근 안산시 정신건강복지센터와 고려대 안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윤호경 교수 연구팀이 감정노동자 48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3분의 2가 “고객응대 중 과다하고 부당한 요구로 스트레스가 있다”고 답했다. 또 응답자의 44.1%가 “우울감을 느낀 경험이 있다”고 답했고, 전체 응답자의 35.5%가 불안감을 느낀 경험이 있었다. 자살 고위험군은 18.2%에 달했다.
◆“정규직 전환 통한 기업의 책임 확대와 의식개선 함께 이뤄져야”
직장갑질 119 관계자는 “콜센터 상담사들은 공공기관이나 금융회사 등 원청회사를 홍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업무를 하지만 대부분 계약직이거나 용역회사에 소속돼 있고, 심지어 프리랜서 계약을 맺어 자영업자로 분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콜센터 근로자들이 회사 관리자들의 직접 지휘에 따라 일하는 경우가 많은 만큼 최근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정규직 전환이 확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콜센터 상담사를 비롯한 감정노동자들에 대한 의식 개선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고려대 김윤태 교수(사회학)는 “구조적으로 보면 사회불평등이 심해진 것도 한 원인”이라며 “불평등이 심해지면 모든 상대방을 경쟁자로 보고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을 무시하거나 혐오하는 경향이 생기기 쉽다”고 분석했다. 이어 “감정노동자들에 대해서는 당연히 소위 ‘갑질’을 해도 된다는 인식이 바뀔 필요가 있다”며 “어릴 때부터 시민교육, 평생교육 등을 통해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를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감정노동자 보호법 있지만… 현장선 "반쪽 효과"
콜센터 직원을 비롯해 ‘감정노동자’로 불리는 고객 응대 노동자를 폭언 및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난해 10월부터 ‘감정노동자 보호법’(산업안전보건법)이 시행됐지만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크다.
감정노동자 보호법은 고객 응대 근로자에게 건강장해가 발생하거나 발생할 우려가 높을 경우 사업주는 피해 노동자가 위험장소에서 바로 벗어날 수 있도록 업무를 일시 중단하거나 휴식시간을 부여하고, 필요 시 치료 및 상담을 지원할 것을 명시했다. 또 피해 노동자가 고객에게 법률적 책임을 묻고자 하는 경우 필요한 지원 등 보호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를 어길 시 사업주는 1년 이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
그러나 근로현장에서는 감정노동자 보호법의 효과를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다. 29일 민노총과 한노총 등이 감정노동의 실태를 알리고 노동자들의 보호를 위해 결성한 ‘감정노동전국네트워크’가 지난해 10월19일∼11월7일 감정노동자 107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47.6%(494명)가 ‘감정 부조화와 손상’ 위험집단에 속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조직의 지지와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응답자도 52.5%(541명)로 절반을 넘었다.
조사에 참여한 이들은 감정노동자 보호제도의 연착륙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봤다. ‘고객의 비정상적인 요구, 폭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피할 수 있다’에 ‘그렇지 않다’는 응답자가 54.5%였다. ‘우리 회사는 내가 고객으로부터 가해를 입었을 때 업무에서 제외해 쉴 수 있게 해준다(줄 것이다)’는 질문에도 ‘아니다’라는 응답이 56.4%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고객의 폭력을 피할 수 없는 이유로 ‘회사는 고객 불만의 정당성보다는 그 자체를 문제삼기 때문에 해결을 위해서라도 피할 수 없다’가 64.8%였다.
한인임 감정노동네트워크 정책팀장은 “감정노동자 보호법 시행령이 원청에 광범위한 책임을 부과한 만큼 이를 잘 연착륙시키는 게 우선 과제”라며 “법 집행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근로감독이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팀장은 “감정노동의 핵심은 ‘잘못이 있더라도 무조건 자신을 감추고 연기를 하는 것’에 있다”며 “고도의 연기를 강요하는 고객평가제도와 인사고과 패널티(벌칙) 연계를 폐지하고 ‘피할 권리 시스템’을 마련하는 등 제도를 개선해 나가는 것이 앞으로 과제”라고 설명했다.
남혜정 기자 hjnam@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