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가영(가명·22)은 고등학교 시절 이 사실을 처음 맛봤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대전으로 거처를 옮기며 가영은 낯선 곳에서 다시 삶을 꾸려야 했다. 한밤의 불청객처럼 날아든 불행은 쏜살같이 덩치를 키웠다. 집안은 갈수록 어려워졌고, 새 학교에도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가영은 2학년에 올라가 끝내 학교를 관뒀다.
차라리 홀가분했다. 낮에 학교에서 흘려보내던 시간에 돈을 벌었다. 집안 생계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 대견했다. 교복을 벗고 앞치마를 둘렀고, 식당 일을 마치면 택배 작업을 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한푼 두푼 끌어모으던 2020년 3월쯤 가영의 앞에 그가 나타났다.
◆‘비정한 모정’ 그 뒷이야기
처음 그를 만났을 때 19살의 가영은 비로소 희망이 찾아왔다고 믿었다. 기댈 곳 하나 없던 가영은 빠르게 그에게 모든 것을 허락했다. 그와 만난 지 3개월 만에 가영의 몸 한구석에 새 생명이 안착했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주변 이들은 모두 출산을 만류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가영은 너무 어렸고, 집안 형편은 여전히 암담했다. 책임지겠다는 그 역시 변변한 직업도, 모아둔 돈도 없었다. 하지만 가영은 새 생명에 감사했다. 남들처럼 잘 키우고 싶었다. 그 흔한 산후조리원조차 가지 못한 것도 아기를 위해서였다. 조리원 갈 돈을 아껴서 분유 한 통, 기저귀 한 팩이라도 더 사야 했다.
“피고인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한다.”
잠시나마 희망으로 차올랐던 가영은 바로 다음해인 2021년 10월 빛바랜 수의를 입고 대전지방법원 재판정에 섰다. 혐의는 아동학대치사. 판사는 “피고인은 피해자를 폭행하고 학대해 사망에 이르게 하는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했다.
1년여 동안 가영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2020년 6월 갑작스러운 임신을 하게 된 가영은 잦은 불안과 우울감에 시달렸다. 그게 우울증인지조차 몰랐다. 제왕절개로 어렵사리 아기를 만난 그녀는 병원에서 퇴원하고 남편과 살던 원룸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가영의 삶은 좁은 원룸에 갇혀 철저히 고립되고 일그러졌다.
가영의 남편은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주 6일 내내 오후 4시쯤에 출근해서 다음날 오전 9시쯤 귀가했다. 지친 몸으로 돌아온 그는 집에선 잠만 잤다. 24시간 온종일 보채는 아기를 붙들고 밥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어르고 달래서 재우는 건 모두 그녀의 몫이었다.
난생처음 겪는 육아와 홀로 싸우며 우울감은 심해졌지만, 가영은 ‘다 내 탓이야, 나만 좀 참으면 돼’라고 수없이 되새겼다. 남편에게 고충을 털어놔도 그는 몇 마디 말로 그녀를 달래고 돌아섰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산후도우미 서비스는 70만원이라는 자기부담금을 내야 했다. 가영 부부에게 너무도 큰돈이었다. 자살 충동에까지 휩싸이면서도 산후우울증이 뭔지 모르는 가영은 자신을 채찍질하기만 했다.
예고된 비극이었다. 생후 1개월의 아기는 쉴 새 없이 울었다. 누구도 아기가 왜 우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기의 뒤통수를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 차례 때렸다. 그리고 수일 후엔 침대에 앉아서 분유를 주던 중 아기를 침대 매트리스로 떨어뜨렸다. 두부 손상을 입은 영아는 결국 숨졌다. 지금의 가영은 그때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비이성과 우울감에 사로잡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자책뿐이다.
◆아기가 떠난 날, 국가는 없었다
10일 정재오 수원고등법원 부장판사는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가영의 사건을 맡았던 대전고등법원 재판장 시절을 떠올렸다. 당시 검사와 변호인이 제출한 쌍방 항소장을 받아든 정 판사는 고민에 빠졌다. 외관상으론 단순했다. 사람의 생명은 가장 존엄하고 근본적인 가치이자 국가와 사회가 보호해야 할 최고의 법익이었다. 여론도 달갑지 않았다. 가영을 향해 ‘비정한 모정’,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정 판사는 모든 법률의 근간이 되는 헌법을 살폈다. 헌법 제36조 제2항은 “국가는 모성의 보호를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정 판사는 이 지점에 주목했다. 국가가 여성에게 사회적·도덕적 책임을 다하라고 요구하려면 국가도 모성을 보호하기 위해 충분한 지원을 베풀어야 했다.
당시 재판부가 보건복지부와 여성가족부에 사실조회를 한 결과, 가영처럼 혼인했으나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임산부를 지원하는 방안은 턱없이 부족했다. 자기부담금 70만원을 내기 어려운 가정에 아무런 육아 지원책이 없다는 점은 국가의 한정된 재원을 고려하더라도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 지점이었다. 세계일보가 69명의 미혼모를 대상으로 실시한 심층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 68명 중 24명(35%)이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베이비박스나 보육원 위탁 또는 입양을 고민한 적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정 판사는 국가의 부재 속 비극적 결말을 이끈 산후우울증에 대해서도 살폈다. 재판부는 가영이 극심한 산후우울증을 적절히 치료받지 못하고 ‘독박육아’에서 허우적대다 비이성적 상태로 치달은 과정을 짚어냈다.
결국 지난해 5월 정 판사는 원심판결(징역 5년)을 파기하고,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이례적이었다. 정 판사는 “자유에 대한 박탈 관점에서 보면 집행유예 판결이 가벼워 보일 수 있지만, 윤리적 관점에선 피고인에게 더 무거운 책임과 죄책감을 주는 것”이라며 “징역을 살고 나오면 죗값을 다 치렀다고 홀가분할 수 있지만, 집행유예는 유예 기간 동안 또는 평생에 걸쳐 죄책감을 느끼고 도덕성을 회복하며 판결의 의미를 삶으로써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6월 정 판사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가영이 보낸 편지였다. 가영은 “5월이 가정의 달이라 딸이 더더욱 그립고 보고 싶었습니다. 평생 죄책감 가지며 살아가겠다고, 부끄럽지 않은 엄마로 살아가겠다고 약속했습니다”라며 “수감 생활을 하며 얻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루를 헛되게 보내지 말자, 의미 있게 보내자는 것을요. 남은 인생 딸에게 용서받으며 살아가겠습니다”라고 전했다.
재판은 이미 끝이 났다. 가영은 더 이상 재판부에 반성문을 보내 선처를 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다시 펜을 들어 죄책감을 고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책임 있는 삶을 약속했다. 정 판사는 “국가가 돈 몇 푼 주고 말 것이 아니라, 산후우울증 등 출산·육아 과정에서 여성이 겪는 고충에 대한 논의를 넓혀야 한다”며 “엄마를 보호하는 것이 영아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복되는 비극…“사회 구조적 문제”
지난해 3월 경북 경산시에서도 갓 태어난 아기가 세상을 등졌다. 아기의 아빠도 엄마도 없는 상황에서 한 20대 여성이 아기를 살리려 노력했지만, 제도권에 도움을 청할 생각도 못 한 채 일어난 참극이었다.
2021년 7월 말 연주(가명·22)는 임신 사실을 알았다. ‘미혼모’가 된다는 건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임신 35주차에 급히 인터넷에서 낙태약을 구했다. 성분도, 효과도 불확실한 약을 삼키며 모든 게 해결되리라 철석같이 믿었다. 예상은 빗나갔다. 2022년 3월경 6시간의 진통 끝에 연주는 자신의 집 화장실에서 출산했다. 사산되지 못한 아기가 변기 속에서 꿈틀댔다. 살아 있는 아기를 본 연주는 공포에 휩싸였다. 친구 효진(가명·22)에게 이 소식을 알리곤 집을 떠났다.
유아교육과를 전공한 효진은 아기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뛰쳐나왔다. 효진의 집은 대구광역시로 경산시와 거리가 있었다. 효진은 어렵사리 택시요금을 빌려 1시간여 만에 기적적으로 아기를 구했다. 생사의 갈림길에 선 아기는 살렸지만 막막했다. 당시 효진은 편의점에서 분유와 젖병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4시간 동안 변기에 방치된 아기의 몸은 저체온 상태였다. 아기를 담요로 둘러 전기장판 위에 눕혔다. 아기의 아빠로 추정된 연주의 전 남자친구에게 마트에서 분유를 사 오라고 했지만 그는 끝내 오지 않았다.
다음날 동이 트기 전 아기는 결국 저체온과 부적절한 영양공급으로 숨졌다. 이 사건으로 연주는 영아살해미수, 효진은 영아유기치사 혐의로 법정에 섰다. 지난 4월 대구고법 재판정에서 연주는 징역 2년형을, 효진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효진을 변호한 김재기 변호사는 “범행의 배경엔 미혼모가 제대로 출산하고 양육하긴 불가한 상황이라는 사회 구조적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