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를 듣다가 따뜻한 사연 하나를 들었다. “보일러 고장으로 물이 차가울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어느 카페의 세면대에 쓰인 문구에 관한 얘기다. 수도꼭지를 틀면서 이 문구를 보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손님에게 이런 따뜻한 배려를 하는 주인의 마음이 섬세하게 느껴진다. 방송을 들으며 운전하고 있던 내게 내비게이션도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해준다. “전방에 과속방지턱이 있습니다.” 이런 기계적인 멘트에도 훈훈해질 때가 있다. 속도를 줄이고 핸들을 꽉 쥐게 되고 최대한 동석자에게 충격을 주지 않으려 애쓰게 된다. 이런 예비의 시간은 최대한의 완충작용을 한다. 사람과 사람의 이별에도 이런 준비의 시간이 필요하다.
아버지와 이별할 때에도 아버지는 내게 준비 시간을 주었다. 가쁜 숨, 희미한 정신, 그 가운데서도 아버지는 온종일 내 눈만 뚫어져라 바라보셨다. 이별을 확실히 예감하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말씀하셨다. “미안하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던 손아귀에 힘을 주며 그건 결코 아니라고 부정했다. 아버지는 한참 후 또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고맙다!” 힘겹게 한 마디를 더 풀어놓았다. 나는 좀 더 수다스럽게 나의 감사함을 더 강조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이목구비를 절대 잊지 않으려고 어떤 붓으로 그려가듯 섬세하게 지켜보기만 할 때였다. 아버지는 내 눈을 더 깊이 들여다보며 평생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말씀을 하셨다. “사랑한다!”
그날의 수첩에 나는 이렇게 기록했다. “오늘 아버지가 내게 하신 말: 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 이 세 마디를 잊어버릴까 봐, 이렇게 쉬운 말을 잊게 될까 봐, 아버지가 죽음을 준비하는 그 예비의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 또박또박 새겨 적었다. 아버지와 이별한 후 수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나는 이 세 마디를 떠올리며 그 준비의 날을 기억한다. 아버지가 내게 남긴 죽음의 준비 시간, 그 불안한 시간 속에서도 크나큰 위안이고 안심이었다. 내 죄책감의 등을 가만히 쓸어주던 아버지 손의 체온을 늘 잊지 않게 한다. 나도 누군가에게 준비 시간을 줄 때가 올 것이다. 그날이 오면 나는 그 준비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기억해 주는 것보다, 그 예비 시간을 통해 나는 그들을 어떻게 안심시킬 것인가.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박성현 시인은 자신의 떠남을 준비하면서 새 시집을 남겼다. 청색종이에서 출간한 ‘그 언덕의 여름, 바깥의 저녁’이라는 시집이다. 시인은 한 권의 시집으로 이별을 준비했다. 수록된 시를 통해 박성현 시인의 마음 준비에는 ‘새’가 함께 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가 되는 변화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나는 죽었고/신은 나를 완벽한 고립에 던져 넣었다/그는 나를 덮은 흙더미에 또 다른 이정표를 꽂았다/덧칠된 화살표 위로/새가 날아갔다/새가 날아가고 방향이 생겼다/황혼이 다시 깊어졌다”(박성현 시인의 ‘새의 방향’ 부분 인용) 그곳에서 ‘새’의 모습으로 새 삶의 방향을 찾겠다는 것일까. 그가 ‘새’로 다시 산다고 생각하면, 왠지 새의 깃털처럼 따스해진다.
마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새 상황의 감정과 최대한 온도차를 줄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차가운 물이 쏟아질 것을 미리 알려주는 한 문장처럼, 마지막 순간에도 나에게 마음의 온도를 맞출 시간을 주신 아버지의 말씀처럼, ‘마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준비’라는 말보다 ‘마음’이라는 말에 더 오래 머물게 한다. 우리는 결국 ‘어떻게 대비했는가’보다 ‘어떤 마음으로 맞이했는가’를 더 오래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변화를 견디게 하는 것은 감정의 온도이며, 우리는 그 온도에 맞춰 천천히 자신을 데우며 다음 순간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뜨거운 음료입니다. 천천히 드세요.” 카페에 앉아 이 글을 쓰다가 새로 차를 주문하던 나는, 이런 말을 새로 듣는다. 따뜻한 찻잔을 건네받는데 더 데워진 마음도 함께 건너온다.
천수호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