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자음과 모음만으로 다양한 예술 세계를 보여온 이건만 작가가 ‘언어의 깊이’를 주제로 한 개인전을 지난달 25일부터 경기도 안양시 YK갤러리에서 열고 있다.
홍익대 미술대학 교수인 그는 텍스트와 이미지가 뒤섞인 현대 시각 환경 속에서, 우리가 ‘실상’이라 여기는 현실 속에서 언어와 시각은 우리와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탐구한다. 특히, 한글이라는 문자 체계를 해체하고 재조합하는 과정을 통해, 언어가 단순한 의미 전달의 도구가 아니라 조형 요소로 기능할 수 있음을 실험하고 있다. 작업은 자음과 모음을 분리하고, 그 순서를 재배열한 후 정해진 사각형의 격자 안에 배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문자들은 겹겹이 겹치고, 접착되고, 색이 덧입혀지고, 때로는 절단되거나 층층이 쌓이며 원래의 읽을 수 있는 형태를 상실한다. 그 결과, 의미는 흐릿해지고 문자들은 이미지로 변모한다. 이 과정을 통해 ‘문자 언어가 진정한 공감과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그에 따르면 캔버스 위에 부착되는 직물은 본래 직조 방식에서 기인한 유연성과 공간성을 지닌다. 경사와 위사로 구성된 천은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공간에 순응하지만, 이를 자르고 덧붙이며 채색하는 행위를 반복하는 동안 점차 그 물성은 변화한다. 원래의 부드러움은 사라지고, 천은 굳어진 시각적 오브제로 고정된다. 그 결과, 직물은 더는 공간에 순응하지 않고, 특정한 시각 구조 속에 갇히게 된다. 이러한 반복과 구조화의 행위는 시각적으로는 일정한 질서와 아름다움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표현의 자유로움과 상호적 관계를 제한한다. 마치 사람의 손으로 설계된 공원이 자연을 닮은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폐쇄적 생태계에 머무르듯, 이 이미지들은 언뜻 보기엔 정돈되고 아름다우나 깊은 교감이나 자유로운 해석을 허용하지 않을 수 있다.
이건만의 작업은 단순히 문자를 재료로 삼는 것을 넘어, 한글을 세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구조체’로서 다시 생각하게 한다. 전시는 이러한 작가의 여정을 조망하며, 한글이 어떻게 추상회화·기호학·동양미학·디자인·산업문화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현대적 조형언어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한글 예술이 ‘읽기’에서 ‘보기’, ‘보기’에서 ‘사유’로 이동하는 과정을 밝히는 하나의 철학적·미학적 실험장이기도 하다.
그는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겹쳐 패턴화하여 한글 모노그램을 탄생시키고 이를 다양한 분야와 오브제에 접목했다. 세련된 감각으로 창작된 한글 모노그램 작업물은 한글의 새로운 미적 가치와 가능성을 선보이며 한글 모노그램 디자인 작업뿐만 아니라 언어를 기반으로 한 ‘소통’이라는 주제를 지속해서 탐구하며 캔버스에 담아왔다. 박서보, 하종현 등 단색화 사조에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시각적 깊이를 더한 작품 세계를 구축해왔다.
이건만은 ‘가장 아름다운 문자’로 호평받는 한글을 작품 소재이자 조형언어로 다루며 ‘K-아트’의 지평을 넓혀왔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국민 생활 속 한글 디자인 개발과 보급에도 힘써 서울 시내 한글 타요 버스, 딤채 김치 냉장고, 갤럭시 노트2 플립 커버,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상품에 그만의 독창적인 한글 제품으로 선보였고, 청와대, 정부부처, 공공기관 등과의 한글 디자인 협업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2012년 서울 핵안보정상회의에 참석한 60개국의 정상들을 위한 의전용 선물로 그가 제작한 한글 넥타이가 공식적으로 채택된 바 있다. 세종문화상 민족문화부문 대통령상, 대한민국 산업전람회-중소벤처기업부 장관상, 제15회 대한민국 디자인대상 산업훈장포장 등을 받은 바 있다.
윤광순 YK갤러리 관장은 “한글의 모음과 자음으로, 아름다운 색면으로, 사람과 삶에 내재 되어있는 시간과 경험을 표현하고 자신의 미학과 생의 철학을 언어와 문자로 소통하고자 하는 이건만 작가의 개념적 미술 세계를 제대로 감상할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5일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