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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독미군 유치전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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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폴란드는 흔히 한국 못지않게 지정학적 취약성이 큰 나라로 불린다. 18세기 프로이센(현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 강력한 제국들로 둘러싸인 이 나라는 결국 국토가 셋으로 분할되면서 지도에서 사라졌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제정 러시아는 공산주의 혁명으로 무너지고, 패전한 독일·오스트리아 제국 역시 민주주의 공화국으로 전환됐다. 1차대전이 끝난 1918년 폴란드가 가까스로 독립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하지만 불과 20여년 만인 1939년 아돌프 히틀러 총통의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며 폴란드는 다시 독일군의 군홧발에 짓밟히고 말았으니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 없다.

폴란드 중서부 도시 포즈난에 위치한 미군 기지 모습. 현재 폴란드에는 미군 장병이 1만명가량 주둔하고 있는데, 대부분은 ‘순환 배치’ 인력인 것으로 알려졌다. SNS 캡처
폴란드 중서부 도시 포즈난에 위치한 미군 기지 모습. 현재 폴란드에는 미군 장병이 1만명가량 주둔하고 있는데, 대부분은 ‘순환 배치’ 인력인 것으로 알려졌다. SNS 캡처

1945년 2차대전 종전 후 폴란드는 소련(현 러시아)의 위성국으로 전락했다. 공산당이 정권을 잡고 수십년간 1당 독재 체제를 이어갔다. 1991년 냉전 종식과 소련 해체의 결과 비로소 공산주의에서 벗어난 폴란드는 서방의 일원이 되고자 발버둥쳤다. 덕분에 199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2004년에는 유럽연합(EU)에 각각 가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과 러시아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다는 지정학적 조건은 그대로였다. 나토와 EU를 통해 서로 엮인 독일은 그렇다 쳐도 러시아는 여전히 폴란드 안보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존재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었다. 폴란드에겐 세계 최강의 미군 주둔이 필요했다.

 

2003년 미국이 독재자 사담 후세인 정권 제거를 명분 삼아 이라크를 침공했다. 미국은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WMD)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폈으나, 핵심 동맹국인 독일·프랑스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 영국은 늘 그랬듯이 미국 편에 섰고 폴란드도 군대를 보내 작전에 동참했다. 이를 두고 “독일, 이탈리아처럼 폴란드에도 대규모의 미군 병력이 상시 주둔하도록 미국 행정부를 설득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란 분석이 제기됐다. 오늘날 폴란드에는 약 1만명의 미군 장병이 있으나 대부분 ‘순환 배치’ 인력이다. 폴란드가 원하는 ‘상시 주둔’은 아니라는 얘기다. 3만6000명이 넘는 주독미군 규모와 비교가 안 된다.

2025년 9월 백악관을 방문한 카롤 나브로츠키 폴란드 대통령(왼쪽)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대화하고 있다. 강성 보수 성향의 나브로츠키는 트럼프와 여러모로 잘 통하는 사이다. EPA연합뉴스
2025년 9월 백악관을 방문한 카롤 나브로츠키 폴란드 대통령(왼쪽)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대화하고 있다. 강성 보수 성향의 나브로츠키는 트럼프와 여러모로 잘 통하는 사이다. EPA연합뉴스

얼마 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독미군 감축 계획을 발표했다. 미국·이란 전쟁에서 미국 편을 들지 않는 독일을 응징하는 차원에서 주독미군 가운데 5000명 이상의 병력을 빼내 다른 곳에 재배치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카롤 나브로츠키 폴란드 대통령은 6일 “트럼프 대통령에게 독일에서 철수할 미군 병력이 유럽 지역에 계속 머물 것을 제안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우리(폴란드)는 미군 주둔에 필요한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는 말로 ‘러브콜’을 보냈다. 독일과 인접해 있으면서 러시아의 안보 위협에 시달리는 폴란드가 미군이 있어야 할 최적지라는 홍보인 셈이다. 다수 한국인은 ‘주한미군 철수’를 외치는 목소리에 익숙한데, 세상에는 ‘미군 유치’에 사활을 거는 나라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