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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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람 없어… 자정기능 상실

[침묵하는 사회] (1) 울리지 않는 경보음
한국 사회가 ‘침묵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둑에서 물이 찔끔찔끔 새는데도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모르는 체하는 사이에 구멍이 점점 커지고 있다. 책임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사들이 회피하는 사이에 가정이, 정부가, 사회가 균열을 키워가고 있다. 위기가 임계점을 넘어 폭발하면서 혹독한 대가를 치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세월호 침몰’ ‘정윤회 국정 개입 의혹’ ‘땅콩 회항’에서 뼈아픈 경험을 했다. 이제는 이 늪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잘못된 것이 잘못되었다고 호통치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입 닫는 데 익숙해진 한국 사회가 침묵의 폐단을 드러내고 있다. 공공부문을 비롯한 각 조직은 쓴소리하는 사람이 없어서 자정기능을 상실하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문제가 생기기 전에 바로잡지 못해 치르는 사회적 비용이 상당하다. 한국 사회라는 거대한 조직이 ‘조직침묵’의 늪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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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폐해의 ‘교과서’ 박근혜정부

취재팀의 설문조사에서 국민은 정치권과 정부 등 공공부문의 침묵현상이 가장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5년 한국 사회에서 공공부문 침묵의 대표 주자는 박근혜정부다. 정부는 침묵 폐해의 ‘교과서’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입을 봉하는 조직의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세계일보가 지난해 11월 ‘정윤회 국정 개입 의혹’ 문건을 보도한 뒤 박근혜 대통령은 “찌라시에나 나오는 그런 얘기들에 나라가 흔들린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고 청와대 문건을 ‘찌라시’로 규정했다. 이 발언이 검찰 수사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이라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청와대 내부나 여당에서는 아무런 이견이 나오지 않았다.

청와대 분위기가 대통령에게 직언하기 어렵게 경직돼 있다는 지적은 정권 출범 이후부터 계속됐다. 대통령이 사소한 것까지 모두 챙기는 ‘만기친람(萬機親覽)형’ 국정운영을 하면서 장관 등이 바른 말을 할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됐다는 것이다.

설동훈 전북대 교수(사회학)는 “대통령이 모든 것을 다 챙기려고 하고 중간 관리자에게 권한과 책임을 위임하지 않아 문제가 생겨도 모두 입을 꾹 다물고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용기 내 ‘경보음’ 울려도 무시

공공부문에서부터 민간까지 침묵이 만연한 한국 사회를 그나마 지탱하는 것 중 하나가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공익제보자다. 공익제보자들은 불의를 폭로해 사회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길잡이다. 그러나 이들의 용기 있는 ‘경보음’은 무시당하거나 침묵을 강요받기 일쑤다.

‘공익제보자와 함께하는 모임’의 김용환 대표는 적십자혈액원 직원으로 일하던 2003년 혈액원의 부실한 혈액 관리 실태를 방송국에 제보했다. 김 대표의 제보로 수혈과 감염 사이의 관계를 밝혀내는 역학 조사가 진행되는 등 많은 성과가 있었다.

김 대표가 처음부터 방송국에 실태를 알린 것은 아니었다. 김 대표는 내부에서 서너 차례 문제를 제기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무시했다.

혈액원에서는 그의 말을 개인 불만 정도로 취급했다. 문제를 정부와 예산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혈액사업 최고책임자를 면담했을 때는 “당신이 맡고 있는 업무나 잘하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조직이 개선의지도 없고 자정능력도 없다고 판단한 김 대표는 방송국의 문을 두드렸다.

김 대표는 “내부고발을 하면 ‘자기 불만’ 혹은 ‘인사 불만’으로 생각하거나 갈등을 조장한다고 생각한다”며 “(내부고발에 대해) 조직적으로 반발하고 매도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고 말했다.

◆‘조직침묵’에 빠진 한국 사회

한국 사회의 여러 조직 중 핵심조직인 정부가 침묵의 폐해를 드러내고, 사회 곳곳에서 바른 말을 막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는 것을 두고 전문가들은 “한국 사회가 ‘조직침묵’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조직침묵(Organizational Silence)이란 2000년 미국의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울프 모리슨이 만든 개념으로 ‘업무나 조직을 개선할 수 있는 의견·정보·아이디어 등을 의도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현상’이다.

조직침묵은 어느 사회에서나 일어날 수 있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문화적 특성이 결합해 서구에 비해 조직침묵이 더욱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군사문화와 상명하복 문화가 유입돼 위에서 소위 ‘까라면 까야 하는’ 분위기가 자리하고 있다. 구성원들은 할 말을 하지 않고 삼킬 것을 은연중에 강요받는다.

고대유 경희대 행정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한국적 조직침묵’이란 조직 구성원이 상황에 체념 또는 순응하거나 상관·동료와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의견이나 이의제기를 회피하는 현상”이라며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권위주의 문화, 공적 업무는 가족의 일을 처리하듯이 하는 가족주의·온정주의 등이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최승원 덕성여대 교수(심리학)는 “한국 사람은 성인이 될 때까지 20년 가까이 내가 의견을 제시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고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고 학습하며 자라고 있다”고 문제를 지적했다.

오현태 기자 sht98@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