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구멍난 안보’…삼척에 나타난 北어선 미스터리 [박수찬의 軍]

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20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북한 어선 삼척항진입 사건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문을 읽고 있다. 연합뉴스

ㅈ-세-29384. 북한 함경북도 경성을 출발해 15일 강원도 삼척에 나타난 북한 어선의 이름이다.

 

길이 약 9m의 2t짜리 소형 어선으로 북한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한 선박이 우리나라의 안보태세를 뒤흔드는 ‘폭탄’이 되고 있다. 

 

이낙연 총리와 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20일 대국민 사과를 하고, 국방부는 이날 합동조사단을 구성해 합동참모본부와 해군 1함대 사령부, 육군 23사단 등을 상대로 지금까지 제기된 의혹을 규명하기 위한 조사에 들어갔다. “전반적인 경계작전에는 문제가 없었다”던 17일 합참의 발표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15일 해양경찰이 청와대에 보고한 내용이 공개되면서 해경 보고와 군 발표가 다른 것을 두고 청와대가 사건 초기부터 개입했다는 의혹마저 확산되고 있다.

 

지난 15일 북한 선원 4명이 탄 어선이 연안에서 조업 중인 어민의 신고로 발견됐다는 정부 당국의 발표와 달리 삼척항에 정박했다고 KBS가 18일 보도했다. 사진은 북한 어선이 삼척항 내에 정박한 뒤 우리 주민과 대화하는 모습. 연합뉴스

◆석연치 않은 北 어선 처리과정

 

통일부는 18일 북한 어선에 탑승한 선원 2명은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고 2명은 귀순한 사실을 알리면서 “선장의 동의하에 배를 폐기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하지만 군은 19일 어선이 동해 해군 1함대에 보관되어 있다며 통일부의 설명을 뒤집었다. 결국 국가정보원은 보관중인 북한 어선 관련 영상을 이혜훈 국회 정보위원장에게 보여주기까지 했다. 

 

북한 주민이 타고 온 선박은 북한의 요청이 있으면 북방한계선(NLL)으로 예인해 북측에 인계한다. 다만 북한 주민이 귀순하는 과정에서 타고 온 배는 북한의 요청이 없으면 선장의 동의를 받아 폐기한다는 것이 군 당국의 설명이다.

 

하지만 북한 선박을 단기간 내 폐기하는 사례는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분석 작업을 통해 정보를 수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귀순한 어부들이 증언한 내용을 검증하기 위해서라도 물적 증거 역할을 할 어선은 당분간 보관할 수밖에 없다. “폐기했다”는 통일부 발표에 놀라움을 표시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이유다.

 

청와대는 “통일부에서 잘못 얘기한 것”이라는 입장이지만, 배에 뭔가 있는 것을 감추려는 의도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귀순한 어부들이 우리 정부로부터 포상금을 받을 만한 물건들을 싣고 왔는데, 이를 숨기려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해경의 상황보고서에는 위성항법장치(GPS)와 통신기, 어구 등이 실려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정부합동조사 과정에서 다른 물건이 발견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1함대에 있는 북한 어선을 보관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자유한국당 백승주 의원도 19일 “북한 어선은 모든 진실이 규명될 때까지 폐기되면 안된다. 폐기하면 증거를 인멸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어민 4명 중 2명이 북한으로 돌아간 과정도 석연치 않다는 말이 나온다. 항해 과정 등 조사해야 할 부분이 적지 않지만, 정부는 귀순 의사를 밝힌 2명을 제외한 나머지 2명을 조기 송환했다. 어선에 탑재된 GPS와 어민 진술을 대조하면서 국가정보원이 주도하는 합동조사를 해야 하나 “본인 의사와 대공용의점이 없었다”며 송환해 버린 것이다. “빨리 돌려보내야 할 이유가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이와 관련해 정부 소식통은 “귀순 의사가 확실했던 2명과 달리 나머지 2명은 귀순 여부를 놓고 애매한 태도를 취한 것으로 안다”며 “예전에는 귀순을 유도하기 위해 국가정보원이 적극적으로 움직였을텐데 이번에는 너무 빨리 돌려보내 국정원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고 전했다. 바른미래당 오신환 원내대표도 “북으로 돌아가면 자기들이 어려워지는 것을 알면서 왜 2명만 빨리 돌아갔는지 의혹이 남는다”고 말했다.

 

◆모든 문제를 군이 감당해야 하나

 

청와대는 이번 사건에 대한 군의 발표를 둘러싸고 제기되는 은폐 논란에 대해 “사실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경계실패 논란에 대해서는 “군이 잘못을 하지 않았다는 변명 같은 뉘앙스의 자료를 내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이라며 강하게 부인하지는 않았다. 경계태세에 문제가 없었다는 지난 17일 군 발표가 잘못됐지만, 의혹이 제기되는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축소나 은폐가 아니라고 하면서 군의 부담이 가중되는 모양새다.

 

이틀이 넘는 시간 동안 북한 어선이 동해를 떠다니는 것을 군과 해경이 감지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해상 경계작전이 실패했다”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해군 초계함과 해경 경비함의 수상 레이더는 적 전투함을 포착하는데 최적화되어 있다. P-3C 해상초계기는 적 잠수함이나 수상함을 감시하는 무기다. 육군 해안경계부대의 열상감시장비(TOD)는 밤에만 사용할 수 있고, 그나마도 선박이 엔진을 가동하지 않으면 포착이 쉽지 않다. 2t짜리 어선을 레이더나 TOD로 포착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레이더에 포착되어야 접근해 식별을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면 발견하기 어렵다. 

 

19일 오전 서울 용산 국방부에서 열린 전군지휘관회의에서 이진성 8군단장이 정경두 국방부장관의 모두 발언을 필기하고 있다. 수첩에 '해상경계작전 실패'(빨간 줄)가 적혀 있다. 연합뉴스

동해 북방한계선(NLL) 방어 문제도 마찬가지다. 호위함과 초계함 수척과 해상초계기, 해상작전헬기 몇 대로 동해 NLL과 그 이남 해역 전체를 물샐틈 없이 수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북한 선박의 NLL 침범을 막기 위해 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전처럼 동원 가능한 해상 전력 대부분을 NLL 일대에 늘어놓다시피 하고 있지만, NLL 일대에 철책선을 만들지 않는 한 언제든 뚫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우리나라보다 전력이 월등한 일본 해상보안청과 해상자위대도 일본 해안으로 밀려드는 수백척의 북한 어선을 모두 잡아내지는 못한다.

 

이같은 문제점을 개선하려면 해상전력 증강이 필요하다. P-3C는 속도가 느리고 탐지범위도 넓지 않으며 운용 대수도 부족하다. 해군은 신형 P-8A 해상초계기 6대를 도입할 예정이지만, 2022년 이후에야 전력화된다. 제트엔진을 장착해 넓은 면적을 빠르게 수색할 수 있는 정찰자산이 더 필요한 실정이다. 다기능위상배열(AESA) 레이더를 장착하고 있으며, 공중과 해상의 작은 표적도 탐지할 수 있는 글로벌아이 조기경보통제기나 MQ-4 해상초계용 무인정찰기 등이 거론된다. 장병의 피로만 가중시키고 북한 선박에 뚫리기 쉬운 현행 해상작전개념의 전환도 필요하다.

 

하지만 군 수뇌부의 인식은 청와대와 별 차이가 없다는 인상이다. 정경두 국방부장관은 19일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이번 사건을 사실상의 경계작전 실패로 규정하고 “장비 노후화 등을 탓하기 전에 정신적인 대비태세를 완벽하게 할 것을 특별히 강조한다”고 말했다. 국방부 합동조사단은 20일부터 북한 어선의 삼척항 입항과 관련해 군의 경계태세를 조사하고 있다. 조사 결과가 발표되면 대대적인 문책이 뒤따를 가능성이 높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19일 서울 국방부에서 열린 2019년 전반기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선 부대에 물샐틈 없는 감시태세를 원한다면 그에 필요한 전력과 적절한 작전계획을 먼저 제공하는 것이 군 수뇌부의 임무다. 노후화된 해안감시레이더와 수량이 부족한 해상초계전력, 해상경계를 육지의 휴전선 지키듯 하도록 한 작전계획을 갖고 일선 부대에 ‘철통경계’를 요구하는 것은 모든 책임을 일선 부대에 떠넘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합참의장을 거쳐 국방부의 수장을 맡고 있는 정 장관이 그동안 자신의 소임을 다했는지 돌이켜봐야 할 대목이다.

 

청와대와 국방부는 강하게 부인하고 있지만, 북한 어선 귀순과 관련해 제기되는 의혹들은 청와대를 향하고 있다. 남북, 북미 대화가 정체된 상황에서 대북 관계와 국민 여론 악화를 의식해 ‘무리수’를 둔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모든 책임은 군이 져야 하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 물론 국방부의 조사과정에서 잘못한 것이 드러난 군 관계자는 처벌해야 한다. 하지만 사건을 수습하는데 필요한 희생양을 군에서만 찾는다면, 군심(軍心)은 정부 및 군 수뇌부와 더 멀어질 것이다. 지금의 이 사태를 초래한 윗선의 ‘그림자’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하는 이유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